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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과(武科)

무과총요(武科總要)

고려시대도 1109년(예종 4)부터 1133년(인종 11)까지 24년 간 무과가 실시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문관들의 반발로 없어졌다가 1390년(공양왕 2) 다시 무과를 설치할 것을 논의한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는 무과가 제대로 실시되지 않았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활발하게 실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무과에는 문과와 마찬가지로 3년에 한번씩 정규적으로 실시되는 식년무과(式年武科)와 그 밖에 임시로 특설되는 증광시(增廣試)·별시(別試)·알성시(謁聖試)·정시(庭試)·춘당대시(春塘臺試) 등 각종 비정규 무과가 있었다.

식년무과는 식년문과와 같이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 등 세 단계의 시험이 있었다. 초시는 식년(子·卯·午·酉에 해당하는 해)의 전해 가을에, 복시와 전시는 식년 봄에 실시되었다. 초시에는 원시(院試)·향시(鄕試)가 있어 원시는 훈련원(訓鍊院)이 주관해 70인을 선발하고, 향시는 각 도의 병마절도사가 주관해서 모두 120인을 선발하였다.

처음에는 목전(木箭)·철전(鐵箭)·편전(片箭)·기사(騎射)·기창(騎槍)·격구(擊毬) 등 6기(技)를 고시했으나, ≪속대전≫ 이후는 목전·철전·편전·기추(騎芻)·유엽전(柳葉錢)·조총(鳥銃)·편추(鞭芻)를 고시하였다.

초시의 시험 장소는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시험 장소인 각 소(所)마다 2품 이상 1인과 당하관(堂下官)인 문관 1인, 무관 2인을 시관(試官)에, 감찰(監察)을 감시관(監試官)에 임명하였다.
복시는 식년 봄에 초시 합격자를 한성에 모아 병조와 훈련원이 주관해 강서(講書)와 무예를 고시, 28인을 선발하였다. 그러나 식년시 28인이라는 규정은 문과와 달리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훨씬 더 많은 인원을 뽑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후기에 오면 식년무과에서 몇 백인을 뽑는 예가 잦았으며, 1894년 마지막 식년무과에서는 1,147인, 문과에서는 57인을 뽑았다.
복시의 시관에는 2품 이상의 문관 1인과 무관 2인, 당하관인 문관 1인과 무관 2인이, 감시관에는 양사(兩司)에서 각각 1인씩이 임명되었다. 전시는 처음에 기격구(騎擊毬)·보격구(步擊毬)로 시험했으나, 뒤에는 11기(技) 중의 1기 내지 2기로써 등급을 정해 갑과 3인, 을과 5인, 병과 20인 등 모두 28인을 선발하였다. 시관은 복시와 같았으나 다만 의정(議政) 1인을 명관(命官)으로 추가하였다.

한편, 식년 이외에 실시된 각종 별시무과에서는 증광시를 제외한 대개의 경우, 각 지방별로 행하는 초시가 생략되었다. 심할 경우에는 단 한 차례의 시험으로써 급제자를 뽑기도 하였다.
또, 이들 각종 별시무과에서는 뽑는 인원도 일정하지 않았다. 대체로 식년시 규정인 28인보다 훨씬 초과하는 경우가 많아 보통 몇 백인, 심한 경우는 몇 천에 달하기도 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정시의 3,200인, 1620년 정시의 5,000인, 1637년(인조 15) 별시의 5,500인의 급제자를 뽑았던 예가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1676년(숙종 2)의 정시에서는 1만 8251인을 뽑아 이른바 만과(萬科)라는 명칭을 낳기도 하였다. 그 결과 조선시대 무과급제자의 총수가 15만인을 초과하기에 이르렀다(문과급제자의 총수는 약 1만 4500인).

한편, 무과의 응시 자격은 애초 규정과는 관계없이 크게 완화되어 서자(庶子)는 말할 것도 없고 천인들도 면천(免賤)이라는 절차를 밟아 얼마든지 응시할 수 있었다. 따라서, 무과의 위상은 문과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미천한 사람들만이 무과에 진출한 것은 결코 아니다. 미천한 사람들이 대거 진출했고, 그에 대한 사회적 의의가 적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좋은 가문의 출신들도 많이 진출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